<자객 섭은낭>의 허우샤오시엔 감독
<자객 섭은낭>은 리얼리즘에 입각한 대만 현대 드라마로 정평이 난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첫 무협영화다. 영화는 고위 관료의 딸로 태어났지만 암살자로 길러진 섭은낭(서기)이 주인공이다. 정치적 이해 때문에 정혼자였던 전계안(장첸)과 이별하고 자객이 된 그녀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전계안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섭은낭은 누구보다 뛰어난 무공을 지녔지만 차마 아이와 함께 있는 대상을 처리하지 못하곤 했던 사람이다. 게다가 한때 정혼자이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그녀의 번민과 고뇌를 우아하고 수려한 영상과 현실적인 액션 신에 담아 보여준다. 모든 인물의 발이 땅에 꼭 맞닿아 있는 <자객 섭은낭>은 무협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자객 섭은낭>으로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자객 섭은낭>은 당 왕조를 배경으로 한 작품 <전기> 중 단편소설 <섭은낭 고사>가 원작이다. 왜 이 작품을 영화화했나?
<섭은낭 고사>는 한자로 1,700자 정도 되는, 여덟 쪽가량의 아주 짧은 소설이다. 대학 시절 때 처음 읽었다. 이야기가 굉장히 재미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소설 제목 자체가 매력적이다. ‘섭은낭’의 섭(攝)은 귀 이(耳)가 세 개 모여 있는 글자다. 그리고 ‘은’은 ‘은신하다’ 할 때 은(隱)이고 ‘낭(娘)’은 젊은 여자를 뜻한다. ‘숨어서 듣고 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은낭은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숨어서 소리를 듣고 모든 걸 판단한다. 듣고 있다가 때가 되면 순식간에 달려가서 대상을 처리한다.
각색을 직접 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주안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워낙 짧은 소설이라 원작에서 참고한 건 시대적 배경과 캐릭터 정도이다. 그 외에는 각색 과정에서 추가됐다. 소설에는 은낭이 공중을 나는 등 무공이 굉장히 뛰어난 사람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현실에 맞게 무술 능력을 수정했다. 이야기는 역사서를 참고해 시대적 배경을 활용했다. 전계안과 그의 어머니 가성공주 등은 모두 실존 인물이다. 당 조정은 번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성공주를 시집보냈다, 전계안의 아버지가 권력을 잡기 위해 피를 묻힌 이야기는 실제 역사에 나온다.
1980년 <귀여운 여인>으로 데뷔 후 처음으로 무협영화를 찍었다. 지금까지 추구한 리얼리즘 영화와는 정반대의 장르다. 지금 무협영화를 찍은 이유가 무엇인가?
영화적 성숙을 이루기 위한 긴 여정 끝에 나온 결과다. 1950년대 대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도서관에서 무협소설을 많이 읽었다. 무협영화들도 많이 접했다. 그래서 언젠가 무협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내 현실주의자적 기질 때문에 쉽게 하지 못했다. 당나라 무협소설을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이 많다. 두 사람이 싸우다 깃발로 변한다든가 벌레로 변해서 적의 뱃속으로 들어가 목숨을 빼앗는다든지 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금은 내 방식대로 무협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배우들의 두 발이 땅에 닿아 있는 것이 좋다. 그래서 중력의 법칙을 기반으로 무술 장면을 촬영했다. 무협영화지만 내 전작과의 연장선에서 봐주면 될 듯하다. 인물과 이야기 구성에 있어서는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기존 무협영화와 많이 다르다. 허우샤오시엔 영화 특유의 롱숏과 롱테이크가 이번 영화에도 나온다.
영화를 하는 데 있어 내게 중요한 것은 리얼리즘이다. 무협영화에서도 리얼리즘을 강조한 이유는 무술에 물리적 제한이 없다면 표현의 끝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제한을 두는 것이 오히려 영화를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이야기가 너무 중구난방이 될 테니까. 그래서 무언가를 짚고 도약하는 것은 괜찮지만 공중을 날지는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모든 무술 동작은 이 기준에 입각해 설계됐다. 무술의 리얼리티를 살리다 보니 롱숏이나 롱테이크도 많이 사용하게 됐다. 싸우는 장면에서 숏테이크를 너무 많이 쓰면 진짜 싸우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가면을 쓴 자객과 섭은낭이 싸우는 장면에서는, 두 배우가 액션 전문 배우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소를 바꿔가면서 롱테이크로 여러 번 촬영했다.
장면에 따라 화면 비율이 바뀌기도 한다.
요즘엔 디지털 작업을 통해 화면을 길게도 찍을 수 있고 옆으로 늘릴 수도 있다. 마치 만화책에서 컷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시도를 영화에서도 해보고 싶었다. 가성공주가 칠현금을 연주하는 장면은 옆으로 긴 악기를 다 보여주기 위해 화면 비율을 달리했다.
<자객 섭은낭>은 여성 자객이 주인공이다. 스승도 여성이고 대부분의 주요 인물이 여성인데, 여성 중심의 무협영화를 만든 특별한 이유가 있나?
당 나라는 실제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시대다. 그래서 여성 중심의 소설이 많다. <섭은낭 고사>처럼 여성 자객이 주인공인 무협소설도 많다. 그리고 내겐 여자들의 세상과 심리가 남자들의 그것보다 더 흥미롭다. 여성은 고유의 감각을 지녔고, 현실에 대한 사유 방식이 제각각 다르다. 영화에서 전계안의 부인 전원 씨는 자기 가문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자객인 섭은낭은 암살을 앞두고 고민한다.
아름다운 영상미가 돋보인다. 촬영지 선정에 고심했을 것 같다.
중국 북동쪽 허베이 지역의 몽골족 자치구에서 대부분 촬영했다. 이곳 해발 1,700미터 정도에 호수가 있는데,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서 자연의 원시적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세트 장면은 대만에서 촬영했다. 당나라 건축물이 나오는 장면은 당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는 일본에서 주로 촬영했다.
<자객 섭은낭>은 공간이 보일 뿐만 아니라 들리기도 하는 영화다. 바람에 나뭇잎이 일렁이는 소리, 고즈넉한 발자국 소리처럼, 인물이 침묵하는 대신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담았다.
그냥 내 영화 스타일 중 하나다. 무슨 영화든 현장의 소리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엔 너무 많은 현장의 소리를 담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년왕사>(1985), <연연풍진>(1986), <해상화>(1998), <카페 뤼미에르>(2003)를 함께한 마크 리 핑빙 촬영감독과 이번에도 같이 작업했다.
워낙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사이기에, 그와는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다. 사전에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촬영장에 오면 각자 알아서 할 일을 한다. 감독으로서 특별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서기와는 <밀레니엄 맘보>(2001), <쓰리 타임즈>(2005)에 이어 세 번째 작품이다. 장첸과도 <쓰리 타임즈>에서 작업한 바 있다. 두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배우들에게 특별한 연기 지시도 하지 않고 리허설도 하지 않는다. 그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할지 알고 캐스팅하기 때문이다. 워낙 좋은 배우들이라 따로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영화감독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자신만의 세계관이다. 창작자는 소설이든 영화든 그림이든 어떤 매개체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무언가를 표현하려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이 필요하다. 때문에 상상력이 필요한데, 나에게는 독서가 큰 영향을 끼쳤다. 문자는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를 통해 나의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관이라고 해서 복잡하고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인간관계처럼, 일상생활에서 늘 접하는 것이다. 하물며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상상력과 기준이 되는 세계관이 필요하다. 나는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쓴다. 그러면 현장에서 지도가 필요 없다.
<빨간 풍선>(2007) 이후 8년의 공백 기간 동안 타이베이영화제와 금마장영화제 위원장을 역임했다. 영화감독으로서 어떤 시간이었나?
금마장영화제에서 약 5년간, 타이베이영화제에서 약 3년간 위원장을 지냈다. 업무상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영화를 많이 접하게 됐다. 그러면서 무협영화를 떠올렸고 <자객 섭은낭>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다 보니 아무래도 집중하기는 힘들었다. 임기가 끝나자마자 본격적으로 영화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 영화를 하면서 당나라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는데, 이걸 살려 다음에도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더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