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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의 백승기 감독
  • 김형석  ( 2016.10.24 )  l  조회수 : 1199
  • “진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숫호구>(2014)와 <시발, 놈: 인류의 시작>(2016)을 만든 백승기 감독은 이른바 ‘C급 영화’를 표방한다. 정식으로 영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는 온라인으로 패러디 단편 동영상들을 공개하며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고, 첫 번째 장편영화 <숫호구>는 제1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서른이 넘도록 연애 한 번 못한 숫총각이 근사하고 섹시한 아바타를 선물 받아 방탕한 생활을 즐긴다는 이 영화는 판타지와 멜로, 코미디, SF를 넘나들며 뻔뻔할 정도로 용감한 시도를 감행했다.

    마찬가지로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된 두 번째 영화 <시발, 놈: 인류의 시작>도 그런 면에서는 궤를 같이한다. 최초의 인류가 희로애락을 체득하는 과정이 어설픈 영어 내레이션으로 원맨쇼에 가깝게 진행되는데, 역시 뻔뻔할 정도로 무모하고 용감하며 장르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이런 영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의견이 갈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영화를 한국에서 본 적이 없다는 사실만은 모두 인정할 것 같다. 주류 영화는 물론, 독립영화와도 차별화되는 백승기 감독의 작품 세계는 현재 한국영화의 가장 이색적인 지대일 것이다.

    미술을 전공했고 영화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고 알고 있다. 영화를 하게 된 계기는?

    어릴 적 꿈이 세 가지였다. 영화 쪽 일을 하는 것, 댄스 가수가 되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앞의 두 가지는 너무 막막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게 그림이었고 예술고등학교를 거쳐 미대에 진학했다. 그런데 미술의 한계를 느꼈다. 몇 달 동안 작업한 작품도 전시회에 잠깐 걸리고 끝나는 거다. 대중과 소통하는 길이 너무 좁았다. 이때 디지털 시대가 열렸다. 캠코더와 컴퓨터만 있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거다. 그래서 친구들과 기존 영화의 패러디 동영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아닌 동영상으로 시작한 셈인가?

    대한민국 UCC 1세대인 셈이다. 2006년부터 블로그를 통해 온라인에 패러디 동영상을 올렸는데 반응이 엄청났다. 친구들과 ‘꾸러기 스튜디오’라는 제작사도 만들었고, 동네 허름한 가게를 인수해 우리 영화를 상영할 극장도 만들었다. 하지만 1세대이다 보니 수익 모델 자체가 없었다. 결국 4년 정도 하다가 포기하고 중학교 미술 계약직 교사가 됐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접었던 건가?

    아니다. 학교라는 공간은 영화 찍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비공식 동아리인 ‘미스터리 영화 제작부’를 결성하고, 아이들과 함께 1년 동안 영화를 찍었다. 2008년에 완성한 70분짜리 장편 <출동 43호>는 나의 비공식 데뷔작이다. 지자체 도움으로 미디어 센터에서 아이들 대상으로 상영했다. 교장 선생님도 좋아하셨는데……. 문제는 이 영화 이후 모든 학교 행사 기록을 나에게 맡기셨다는 거다. 아이들의 학교생활부터 수학여행과 체육대회까지, 그 모든 것을 기록해서 편집했고, 엄청나게 혹사당했다.


    첫 영화 <숫호구>는 어떻게 기획한 건가?

    학교 행사 기록을 할 바엔, 그만두고 내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을 캐릭터로 삼았다. 순수한 허세를 부리는 찌질한 남자들? 하지만 “당당하게 찌질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라보았고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제작비는 500만 원 정도 들었다.

    <숫호구>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처음부터 영화제 출품을 계획했던 건가?

    그렇다. 영화제마다 성격을 파악했고, 부천영화제와 가장 잘 맞을 것 같아 거기에 냈다. 난 그때 정말 지겹게 들었던, “진짜 영화는 언제 만들어요?”라는 질문을 그만 듣고 싶었다. 장편영화를 만들어서 극장에서 상영하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운 좋게 상(후지필름 이터나상)도 타고, 배급사까지 생겨 극장 개봉까지 하게 됐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전작과 성격이 다소 다르다. 꽤 진지하고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룬다.

    <숫호구>의 배급사였던 엣나인에서 제작비 1,000만 원을 지원했다. 사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숫호구>보다 먼저 만들고 싶었던 영화였다. 인간의 몸과 정신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의외로 진지하고, 결국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사람들은 ‘C급 영화’라고 하면 ‘잭애스’ 시리즈처럼 바보처럼 웃기기만 하는 걸 떠올리는 것 같다.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은 그 기대를 저버린 셈이다.


    어떤 비판들이 있었나?

    영화가 뒤로 갈수록 필요 이상으로 진지해져서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버렸다는 것. 할 말은 있다. 동영상만 만들다가 진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서 <숫호구>를 만들었고, 어떤 의미를 넣고 싶어서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을 만들었다. 그런데 관객 반응을 접하고서 고민이 많아졌다. 진지함보다는 C급 영화다운 웃음을 줘야 하나? 생각 중이다.

    지금 기획 중인 영화는 무엇인가?

    우주 배경의 SF다. C급 영화 특유의 ‘재치 있는 병맛’도 중요하지만, 이번엔 ‘영화적 요소’를 중시하고 싶다. 연출, 시나리오, 콘티, 촬영, 조명……. 이런 기본적인 영화적 요소들을 소홀히 여기며 영화를 만들어온 것 같다.

    제작 상황은 어떤가?

    <숫호구>가 의외의 성과를 거두고 나서 <시발, 놈: 인류의 시작>을 찍을 때만 해도 사기가 올라 있었다. 하지만 실패를 맛본 지금, 분위기가 안 좋다. 투자도 더 어려워졌고. 하지만 차라리 기회라고 생각한다. 어설픈 투자가 들어왔다면, C급 영화의 성격을 잃었을 수도 있다. 지금 각오는 하나다. 영화 만드는 것 외엔 어디에도 기를 빼앗기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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