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 접속 통계
  • 홈
  • 뉴스/리포트
  • 뉴스
  • 메일쓰기
  • 페이스북
  • 트위터

뉴스

넷플릭스,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을 흔들다

2017.11.23
  • 작성자 송순진
  • 조회수10280
넷플릭스의 투자 전략으로 큰 변화 겪는 일본 애니메이션
 
  

단지 플랫폼으로 머물기를 거부한 넷플릭스가 글로벌 콘텐츠 산업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세계 각 나라에서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추구하는 넷플릭스의 전략이 거대 미디어 기업에 의존해야 하는 현지 제작사들에게 탈출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크게 두드러진다. 

넷플릭스 투자금 80억 달러, 상당 부분 애니메이션에 투자
 
 
최근 몇 년간 넷플릭스는 오리지널 일본 애니메이션들을 꾸준히 선보였다. 2016년에 공개된 <아인>시리즈와 2017년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블레임!>(두 편 모두 ‘폴리곤 픽쳐스(Polygon Pictures)’ 제작) 등이다. 2016년작 <쿠로무쿠로>처럼 일본 외 나라에서 인터넷/VOD 판권을 구매한 애니메이션도 여럿이다. 넷플릭스는 “지난여름 일본에 12편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장편 애니메이션 <고질라>를 주문했다”고 발표했다. 또 2017년 3분기 실적 발표에서 “2018년 콘텐츠 투자금이 8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 발표했고 외신들은 이 중 상당 부분이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투자될 것이라고 보도했다.(그러나 모든 애니메이션이 일본에서 제작되는 것은 아니다. 콘텐츠 최고 책임자(CTP) 테드 사란도스는 “넷플릭스는 다양한 국가에서 30편이 넘는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를 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전편을 일본에서 수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가 일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발주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미국 영화전문매체 <할리우드 리포터>는 특집 기사를 통해 넷플릭스가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 집중 보도했다.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몇몇 스튜디오들의 명성을 높이고 있지만, 대다수 애니메이터들이 수치스러울 정도의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 와중에 2017년 80억 달러의 콘텐츠 투자를 예고한 넷플릭스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비즈니스 모델을 크게 바꿀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최대 전성기, 속사정은 저임금 과잉 노동
 
 
최근 7년간 성장세를 이어온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은 지난해 최대 전성기를 맞이했다. 총 52개 스튜디오가 회원으로 가입된 ‘일본애니메이션협회(AJA)’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업계 매출액은 약 10% 가까이 성장해 처음으로 2조 엔을 넘어 177억 달러(약 2조1천억 엔)를 기록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의 흥행에 힘입어 일본 박스오피스 내 애니메이션 점유율이 14%를 기록했고 총수익은 5억8,500만 달러(약 663억 엔)을 넘어섰다. 해외 수출 또한 호조를 보였다. 해외 극장 배급, 방영권, DVD/블루레이 및 라이센스 상품 판매 등을 모두 포함해 일본 애니메이션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돈은 67억9천만 달러(약 7,616억 3천만 엔)에 달했다. <너의 이름은>과 <백일홍: 미스 호쿠사이>가 세계 영화제를 휩쓸며 화제에 올랐고 이 중 <너의 이름은>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흥행에 성공하며 중국 내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이런 호황 속에서도 정작 애니메이터들은 산업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한다. <스크린데일리>가 지난 10월 제30회 도쿄국제영화제에서 특별전을 연 <백일홍 : 미스 호쿠사이>의 하라 케이이치 감독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런 분위기가 충분히 감지된다. 하라 케이이치 감독은 “일본 애니메이션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콘텐츠로 인정받고 있지만 산업은 여전히 미성숙하다”면서 “최근 일련의 일본 장편 애니메이션들이 성공한 것이 오히려 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가리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극장용 장편을 제작할 수 있는 애니메이터는 손에 꼽힐 정도다. 거의 모든 프로덕션들이 인력 부족과 과잉 노동 환경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극영화 스태프들의 임금이 턱없이 낮다는 것이다. 재능 있는 인재들은 임금이 높은 게임 산업으로 빠져나간다. 애니메이션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기술과 노동에 상응하는 일정 수준의 급여가 지급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업계가 새로운 인재를 성장시킬 수 있다.” <할리우드 리포터> 역시 “노령화가 급속도로 진행 중인 일본에서 젊은 노동력의 부재는 사회 전반의 문제다. 여기에 신입 애니메이터들의 저임금, 과잉 노동 등이 추가된 상황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성장은 다분히 제한적”이라고 지적하고 나섰다. 넷플릭스와 아마존, 그리고 중국의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일본의 모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2020년까지 모든 스케줄을 쏟아 붓고 있지만,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산업의 판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투자방식, 일본에서 새로운 영향력 형성
 

이런 분위기 속에서 넷플릭스의 투자 방식은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극장용 장편이지만 실질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국내용 TV 시리즈다. <할리우드 리포터>에 따르면 일본의 자국용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극장판 수입의 10배에 달하는 연간 50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그러나 TV 시리즈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생존을 무조건 책임져 주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TV 시리즈가 방송을 마친 뒤 사장되기 일쑤고 라이센스 상품, DVD, 사운드트랙 등 추가 수익을 내는 사업은 광고가 가능한 방영 기간에만 수익을 낼 수 있다. 게다가 광고비 역시 스튜디오에서 부담해야 한다. 해외 판매 역시 스튜디오들에겐 추가 매출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TV 방송사들의 지나치게 낮은 예산 책정이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일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은 저임금, 과잉노동으로 인해 많은 신인 애니메이터들에게 ‘블랙컴퍼니’로 불린다. 이에 대한 주요 원인은 방송사가 충분한 제작비를 내놓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넷플릭스가 일본 방송사보다 훨씬 많은 제작비를 투자한다는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전했다.
  
넷플릭스의 12부작 애니메이션 시리즈 <조디악의 기사: 세인트 세이야>를 제작하고 있는 ‘토에이 애니메이션(Toei Animation)’의 프로듀서 조셉 추(Joseph Chou)는 “최근 일본 언론이 애니메이션 업계의 노동 환경에 대한 우려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정작 이를 방송하고 있는 TV 방송국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라고 비난하면서 “오히려 넷플릭스가 업계를 정상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기존에는 5%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면 이제는 15%의 마진을 남길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또 “넷플릭스, 아마존, 크런치롤(Crunchyroll), 애플 스튜디오 등의 기업들이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자 전부와 미팅을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넷플릭스가 가장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넷플릭스는 제작 방식에도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넷플릭스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직접 계약을 맺자, 영화와 TV 시리즈 등 일본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제작위원회(製作委員会, production committees)의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한 제작사가 작품에 대한 부담을 혼자 짊어지지 않고 다수의 회사들이 공동으로 참여해 수익과 손실을 배분하며 ‘000 제작위원회’ 식의 임의 제작사명으로 프로덕션을 진행하는 관행이 있다.(국내에서도 영화 <대결>, <이층의 악당>, <나의 PS 파트너> 등이 '000문화산업전문회사’, <반두비>, <도쿄택시> 등이 ‘000제작위원회‘ 등 비슷한 형식을 도입한 바 있다.) 제작위원회에는 보통 5개에서 많게는 15개의 회사들이 참여하는데, 제작위원회가 리스크를 분담하는 대신 광고 대행사, TV 방송사, 신문사 등에 홍보를 위한 수익 배분 또는 인센티브 지급 등을 대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작위원회 방식의 최대 단점은 투자에 참여한 모든 회사들의 승인을 얻어야 진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의사 결정이 느리고 독창적인 시도가 제한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넷플릭스의 방식은 보다 빠른 제작기간과 보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시도를 가능케 하리란 기대를 모으는 중이다.

더 빠르고 창의적인 시도 이루어질까
 

넷플릭스와의 계약을 통해 아예 배급 방식을 바꾼 스튜디오도 있다. 도쿄에 위치한 TMS 엔터테인먼트(TMS Entertainment)다. 지난 1월, 넷플릭스는 격투기의 세계를 다룬 유명 일본만화 <바키>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TMS 엔터테인먼트와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바키>의 경우, 2018년 여름부터 일본 넷플릭스에서 26편의 에피소드를 주 1회씩 방송한 뒤 일본 현지 TV 방송사를 통해 방영하고, 2018년 말에는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TMS 엔터테인먼트의 배급&라이센스 최고 담당자 코타로 요시가와는 “넷플릭스는 20개 이상의 외국어 자막과 몇 개의 더빙 버전을 제작해 200여 나라에서 한꺼번에 배급하는,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다”며 넷플릭스와의 협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향후 넷플릭스가 일본 애니메이션 공정을 어떻게 바꾸어나가게 될지. 콘텐츠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가운데 넷플릭스의 실험은 지속되고 있다. 참고로 <할리우드 리포터>는 기획 기사의 제목을 “넷플릭스는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을 어떻게 붕괴 또는 성장시킬까?”라고 내걸었다. 의미심장한 문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