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 서 있는 독립영화들을 지켜봐 달라”
올해 3월,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는 15년간 이어져온 조영각 전 집행위원장 체제에서 김동현 집행위원장 체제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그러나 2006년 프로그램 팀장으로 서독제에 합류해 사무국장과 부집행위원장을 거쳐 집행위원장에 이른 김동현 위원장이야말로 서독제의 역사와 본질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오는 11월 30일, 제43회 영화제를 앞두고 있는 김동현 위원장을 만나 올해 서독제가 소개하는 한국 독립영화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일련의 정치사회적 고난 속에서도 내공 하나로 버텨온 독립영화들의 현재를 지켜봐달라고 이야기한다.
영화제 프로그램이 거의 다 나왔다. 올해 서독제에서 소개할 작품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됐나?
사실 시기상으로 서독제가 새로운 영화를 발굴하기에 불리하다.(웃음) 그래서 ‘프리미어(최초 상영)’에 힘을 싣지 않고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을 꾸려왔는데, 그러다보니 관객들이 실망을 하더라. 영화제에 ‘에지’가 없다고.(웃음) 그래서 올해는 너무 많은 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은 일단 제외하고 올해의 경향을 조망할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별하는 등 영화제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또 서독제가 한해를 마무리하는 결산영화제로서 자리매김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프로그램을 짰다.
그렇다면 서독제가 제시하는 올해 한국 독립영화의 경향은 어떻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경향은 여성 이슈다. 요즘 상업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의 부재와 전형성에 대한 지적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올해 서독제 상영작은 정말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을 보여준다. 장편에서는 주로 고통 받는 청소년,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지만 단편에서는 아동부터 중년, 노년까지 주인공의 폭도 넓다. 또 여성의 고통 자체를 고발하는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올해에는 여성 캐릭터들이 주체적으로 어떤 액션을 취하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여성과 연대를 한다거나 아예 가해자를 처단하는 실천적인 모습들이다. 이런 경향 역시 단편에서 더 두드러지는데,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단편영화의 특징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 서독제 내에서도 집행위원이나 심사위원을 남녀 동수로 진행하는 등의 변화가 반영된 것일지 모르겠다.
다큐멘터리 부문에서는 밀양과 소성리 등 정치사회적인 이슈의 중심이 된 투쟁 현장의 오늘과 과거를 함께 조망하는 작품들이 두드러진 경향성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박배일 감독의 <소성리>와 구자환 감독의 <해원>이 바로 그렇다. 지난 10년간 독립영화계가 스스로를 깊이 있게 성찰하면서 얻은 결과물이 작품에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또 주요 독립영화 감독들의 연작 시리즈가 서독제에 다 모인다. 김소영 감독의 망명 3부작 마지막 작품인 <굿바이 마이 러브 NK>와 민병훈 감독의 아티스트 시리즈 <황제>, 정재은 감독의 세 번째 건축 다큐멘터리 <아파트 생태계>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꾸준히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독립영화의 장점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들 작품은 아예 시리즈를 표방하고 만들어졌다. 그런 작품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건 특별한 의미다. 올해에는 유독 장편 데뷔작이 많은데 올해 상영작 111편 중 장편 30편의 50%가 데뷔작이다. 그만큼 도전적인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규격화된 독립영화의 관성을 벗어나 엉뚱한 매력을 가진 <산나물 처녀>를 비롯해 시골 여고생들의 스포츠 성장 드라마 <소은이의 무릎>,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블랙코미디 <소공녀> 등이 새로운 결을 보여준다. 그동안 독립영화에서 종종 등장했던 소재인 ‘가출팸’을 충실한 취재를 통해 가장 현실적으로 그려낸 <박화영>도 눈여겨 볼만한 작품이다.
기획전들이 눈에 띄는데 1980년대부터 영화 운동을 펼친 故 홍기선 감독과 다큐멘터리스트 故 박종필 감독의 특별전이 마련된다.
서독제는 프로그램을 굵직굵직하게 잡고 가는 편이다. 단편, 장편 경쟁 부문과 신진 작가들의 장편 데뷔작을 주목하는 ‘새로운 선택’, 기성 작가 중심의 화제작 라인업을 모은 ‘특별초청’, 그리고 특별기획과 해외초청작이다. 이 중에서 故 박종필 감독, 故 홍기선 감독의 특별전은 독립영화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미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故 홍기선 감독 특별전을 진행했지만 서독제에서 다시 여는 것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독립영화 후배들이 헌정하는 특별전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 홍기선 감독의 대표적인 독립영화 두 편 <수리세>, <파랑새>의 경우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이 나왔지만 이를 소구할 수 있는 공간은 현재 영화제뿐이다. 많은 독립영화인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故 박종필 감독 특별전 역시 마찬가지다. 단편 <시설장애인의 역습>이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것을 비롯해 그의 초기작 대부분이 서독제에서 상영됐다. 또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버스를 타자!>가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서독제는 그의 작품을 영화적으로 주목해왔다. 그런 점에서 두 개의 특별전은 규모는 작지만 심혈을 기울인 프로그램이다.
가장 최신의 트렌드를 반영한 ‘신작 웹드라마 쇼케이스 : 독립영화 창작의 확장’은 독립영화 진영의 영화인과 관객층 모두가 관심을 가질 만하다. 최근 인디스토리가 백승화 감독의 웹드라마 <오목소녀>를 제작 발표하는 등 독립영화계와 웹드라마의 컬래버레이션이 강화되는 추세다.
웹드라마 기획전에는 윤성호 감독의 <내일부터 우리는>과 <아이돌 권한대행> 두 편을 장편영화 버전으로 재편집해 상영한다. 마침 윤성호 감독이 두 작품을 서독제에 출품해줬고, 웹드라마의 기획적인 부분에 집중해보고자 특별전을 꾸렸다. 독립영화와 웹드라마가 별개인 것 같지만 웹드라마 초창기에 많은 독립영화인들이 역할을 했다. 박현진, 이우정, 박동훈, 임오정, 한인미 감독 등 많은 독립영화 감독들이 웹드라마에 참여했고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윤성호 감독이다. <은하해방전선>, <도약선생> 등에서 보여준 톡톡 튀는 고유의 화법을 그대로 웹드라마에 가져가 정착시킨 셈이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독립영화 제작환경이 점점 더 열악해진 가운데 갈증을 느끼던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물꼬를 터준 것이 또 웹드라마다. 독립영화가 가져야 할 새로운 비전이 무엇인가 생각해봤을 때, 무게감 있는 주제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다양한 플랫폼과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웹드라마가 독립영화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집행위원장으로서 처음 여는 영화제다. 기분이 어떤가?
처음에는 무척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괜찮다. 계속 하던 일이라 크게 다르진 않고 특히 후배들의 포지션이 바뀌다 보니, 실무를 도와줘야 할 부분이 많다. 그래서 올해는 유독 바쁜 것 같다(웃음).
취임 당시 영화제 시스템을 안정화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영화제 실무자로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지점이 무엇이었나?
예전과 달리 지금 한국 독립영화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다. 특히 감독을 중심으로 대중적 인지도가 성장했고 스태프들 역시 노동권에 대한 문제 제기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나름의 발전이 있었다. 그런데 독립영화인 중 90% 이상이 창작자다보니, 독립영화를 유통하고 상영하는 과정에서 누가 얼마나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른다. 기획과 배급, 상영 같은 일이 독립영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한데, 이 분야의 실무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다. 나 역시 서독제 실무자로 오랫동안 일해 왔지만 워낙 박봉인 데다 환경이 열악하니 사람이 자주 교체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이 과정의 전문성을 획득하는 게 참 어렵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있다. 독립영화 관객을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누면, 하나는 감독 지망생이고 다른 하나는 창작은 아니지만 어떤 형식이든 독립영화와 연결고리를 맺고 싶어 하는 분들이다. 그 중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 영화제 자원 활동가로 나서는 경우가 있다. 이는 독립영화 관객이 독립영화계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 분들을 위한 아카데미, 이를테면 ‘기획자 학교’를 만들어 전문성 있는 인재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또 기획, 유통 부문 실무자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이들의 역할을 독립영화계 전체가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최근 조영각 전 집행위원장이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다. 앞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기대되는 상황이지만, 가장 시급하게 개선되어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제일 우선은 역시 창작 환경이다. 영화가 있어야 관객이 생기고 관련 정책과 사업들이 생긴다. 그리고 독립 장편영화 제작 시스템뿐 아니라 실험영화,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는 영화들을 공동체 방식으로 배급하는 등 배급 시스템에 대한 실험도 이뤄졌으면 한다. 단관 극장들도 너무 많이 없어졌다. 그동안 독립영화 전용관들을 너무 흔들어놨기 때문에 분명한 사과와 보상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독립영화 극장들이 영세하다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되는 게 안타까운데, 이들 극장에도 관객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시설 투자, 공동 브랜딩, 공동 프로모션, 프로그램 개발 등을 지원해서라도 얼마 남아있지 않은 독립 단관극장들을 보호해줬으면 한다. 멀티플렉스에서 예술영화 전용관이 하나 생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제대로 된 시네마테크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독립영화인들이 새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독립영화계가 공유해야 할 비전이 필요한 시기다.
그동안 자칫 엄청나게 후퇴하거나 심지어 사라질 수 있었던 독립영화를 지켜내기 위해 독립영화인 모두 굉장히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려운 국면 속에서 지금의 자리를 지켜내는 데만 급급해 장기적인 비전을 논의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다행히 올해 하반기부터 네트워크 회의를 통해 독립영화 진영 각각의 현안들을 공유하고 정책적으로 이슈를 제기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올해 서독제에서도 ‘블랙리스트를 넘어서 새로운 영화 정책을 말하다’라는 포럼을 열고 한국 독립영화가 추구할 새로운 비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서독제를 찾아올 영화인들과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국 독립영화계가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때그때마다 중요한 작품들이 등장해줬고 다음 작품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독립영화인들의 내적인 힘이 만들어낸 결과다. 때론 독립영화가 너무 많은 기대를 받거나, 쓴 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서독제 상영작 111편이 다 만족스러울 순 없다. 그러나 독립영화는 미래의 영화다.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미래의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진 한국 독립영화들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올해 서독제의 슬로건도 ‘메이드 인 나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