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2016년 개봉한 디즈니의 <도리를 찾아서>에서 문어 ‘행크’를 담당한 한국계 애니메이터 에릭 오 감독이 독립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세계무대에 다시 섰다. 지난 제42회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TV 크리스털 제작상을 수상한 <피그: 더 댐 키퍼 포엠즈>를 통해서다. 이번 작품은 2014년 발표된 다이스 츠슈미(Dice Tsutsumi), 로버트 콘도(Robert Kondo) 감독의 단편 <더 댐 키퍼>(2014)를 바탕으로 주인공 돼지의 어린 시절을 그린 것이다. <더 댐 키퍼>에서 애니메이션 슈퍼바이저로 참여했던 에릭 오 감독은 이번엔 각본과 연출을 맡아 10분짜리 10편의 TV 시리즈를 완성시켰다. 유려하고 서정적인 동화 같은 그림 속에 묵직한 감성을 담아낸 <피그: 더 댐 키퍼 포엠즈>는 젊은 창작자들이 중심에 선 돈코하우스(
www.tonkohouse.com)의 작품이기도 하다. 디즈니 출신의 젊은 애니메이터들이 의기투합해 만들어가고 있는 돈코하우스에서 제2의 창작 인생을 준비하고 있는 에릭 오 감독과 서울에서 만났다.
돈코하우스가 제작한 <피그: 더 댐 키퍼 포엠즈>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2014년에 발표된 18분짜리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 <더 댐 키퍼>의 연출을 맡은 다이스 츠슈미와 로버트 콘도 감독은 디즈니 픽사 출신 동료들이다. (2012년 두 사람이 독립 스튜디오 돈코하우스를 설립하고) 내게 <더 댐 키퍼>의 애니메이션 슈퍼바이저를 제안해 기획부터 참여했다. 이야기는 어두운 먹구름이 마을을 덮치면서 시작된다. 먹구름을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아버지는 떠나고, 홀로 남아 거대한 풍차(댐)를 만들어 마을을 지키는 돼지의 이야기였다. 단편이 보여준 세계관이 좋은 반응을 얻어 이걸로 긴 호흡의 TV 시리즈를 만들게 됐는데, 이번에는 연출과 각본을 내가 맡게 된 것이다. 단편의 주인공이 13살 정도였다면 <피그: 더 댐 키퍼 포엠즈>에서는 주인공 돼지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을 그렸다. 구체적인 서사가 아니라 기억의 파편을 시적이고 몽환적으로 묘사하려 노력했고 유년의 상처, 아버지와의 관계 등 깊이 있는 이야기로 확대하고자 했다. 그런 지점들이 안시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듯하다.
제작 과정이 궁금하다. 31,000개 프레임을 손으로 일일이 그렸다고 들었다.
여느 독립 애니메이션이 그렇듯 이번 작품도 일정과 예산이 굉장히 빠듯했다. 미국 팀 9명, 일본 팀 11명 정도로 전체 스태프 스무 명을 꾸려 러프한 그림을 그리는 팀, 클린업 팀, 채색 팀 등으로 분업했다. 그림 하나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으니, 따지고 보면 작업 분량은 그 몇 배가 될 것이다. 나는 회화를 전공했고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전통적인 2D 애니메이터이기 때문에 개인 작업은 거의 이렇게 만든다.
이번 작품을 제작한 돈코하우스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돈코하우스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만든 미국 회사다. 현재 20여 명 정도가 일하고 있는데 핵심 멤버 모두 디즈니 픽사 출신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픽사 출신들이 만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알려져 있다.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VR, AR, 출판, 장편영화, 3D, 전시 등 다양한 창작활동을 기획하고 외부 전문 기업들과 협업해 창작물을 만든다. 내부에서 VR 아이디어가 채택되면 VR 전문 기업을 찾아 컬래버레이션 하는 식이다. 말하자면 창작자들의 원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회사다. 대표들이 일본계이기 때문에 일본 네트워크가 탄탄하고 넷플릭스, 구글, 훌루 재팬, 폭스와도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글로벌 회사로 발전할 가능성이 큰 회사다.
그렇다면 에릭 오 감독도 돈코하우스 소속인가?
법적으로는 파트너십 관계다. 그러나 소속 작가로 봐도 무방하다. 돈코하우스는 나의 비전을 펼치는 데 꼭 필요한 날개 같은 존재다. 우리는 창작자로서의 여정을 함께 하고 있다. 내 욕심은 돈코하우스를 통해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이다. 기획 중인 작품이 있는데, 그걸 한국에서 투자배급받고 작업도 한국 스튜디오와 함께 컬래버레이션 하면 어떨까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계에서 의미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피그: 더 댐 키퍼 포엠즈>는 일본에서 훌루 재팬을 통해 배급됐다. 이외 나라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또 한국에서는 영화제를 통해 소개될 가능성이 있나?
프랑스에서는 현재 극장 상영을 준비 중이다. 각 에피소드마다 기승전결이 있지만, 기획 단계부터 장편의 호흡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1화부터 10화까지 연달아 보면 감정선과 캐릭터들의 관계성이 더욱 뚜렷하게 연결된다. 한국에서 공개할 방법도 고민 중이다. 사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 이유가 그 때문이다.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소개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보는데, 영화제를 통해 첫 선을 보일지 아니면 우리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이벤트를 열어 상영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엄연히 상업 작품이다 보니, 홍보와 마케팅 효과가 큰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동안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터로 일하면서도 꾸준히 자기 작품(<더 웨이 홈>, <하트>, <사과를 먹는 법>, <귄터> 등)을 내왔고 결국 독립을 선언했다. 많은 애니메이터들이 선망하는 디즈니 소속이 아닌,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더 무게를 두겠다는 의미일까?
애니메이션도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거의 비슷하다. 프로덕션 디자인을 하고 캐릭터가 연기한 것을 편집해서 음향을 넣는다. 나 같은 경우 모든 걸 스토리텔링과 함께 구상한다. 어떤 작곡가가 음악을 만들 때 단순히 멜로디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가사와 음향, 편곡 등이 한꺼번에 떠오른다고 하던데, 나도 비슷하다. 게다가 지금까지 나는 사회가 규정하는 직업에 상관없이, 항상 나 자신이 스토리텔러라고 생각해왔다. 때문에 디즈니에 있으면서 전체의 일부분만 담당하는 것보다 전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감독이 되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한 문제였다. 7년간 픽사에서 배우 역할을 했는데, 만약 계속 일한다면 더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감독이 되려면 수많은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하고 15년 이상을 기다려야 기회가 있을 것 같더라.(웃음) 픽사를 나온 건 내게도 중대한 결정이었다. 언제나 새로운 모험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이런 선택을 하게 됐다.
독립 애니메이션 시장은 매우 협소하다. 한국은 더 그럴 것이다.
한국에는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이 많지만 좋은 스토리와 디렉터가 부족해 시장에서 실패를 반복한다고 본다. 그래서 투자자들도 독립 애니메이션을 포기하고 돈이 되는 어린이 애니메이션 쪽으로 진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그런 구조에서는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혁신적인 창작물이 나오기 힘들다. 돈이 된다는 확신 없이는 배급사와 제작사들이 지갑을 열지 않고, 그래서 창작자들도 도전을 하지 못한다. 내게는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싶은 욕심과 책임의식이 있다. 값진 프로젝트가 한국에서 만들어져 애니메이션 업계에 새로운 반향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만큼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이 크다. 내가 배운 것들을 한국에 어떻게 소개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결국엔 오리지널리티가 중요하다. 지금 미국과 중국에서는 거대 자본이 애니메이션 산업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한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그 방식을 따라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들이 만든 게임판에 들어갈 게 아니라 새로운 판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