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미 감독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단편 경쟁
부문에 초청된
정유미 감독의
신작 <서클>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찰나의
시간 동안
함께한 낯선
이들이 운명처럼
하나로 모인다”라는
논평을 남겼다. 2010년 <수학시험>부터 <서클>까지 정유미 감독은
네 번이나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으며 베를린의
총애를 받는
연출자가 되었다. <서클>은 한 소녀가
무심코 그린
원에 사람들이
모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한 편의
우화다. 영화제가 개최되기
직전 정유미
감독의 신작 <서클>과 그녀의 작품세계를
두고 긴
대화를 나눴다.
정유미 감독 “자신을 얽매는 관념을 의심해보길”

<서클>
-베를린뿐만 아니라 칸, 로카르노,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등 다양한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세계적으로 작품이 인정받는
이유가
있을까.
=일단 단편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제작하는 감독들이
드물다. 그런 산업적
특성 때문에
계속 영화제에
초대받는 게
아닐까. 또한 내
작품에는 내레이션도
대사도 없다. 즉 언어가 없는
작업인 셈이다. 언어의 부재를 모두가
공감할 보편적인
메시지로 채우기
때문에 국제
영화제들에서도 상영되는
것 같다.
-공백기가 길었다. 이어 3년 연속으로 신작을
발표했다. 근래 활발하게 작업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연애놀이>(2012) 이후 매듭을 못 짓고 멈춘 작업이
있었다. 그 작품을 끝내지 못하고, 5년간 작업을 중단했다. 앞으로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겠느냐는 고민이 많았다. 막상 지내보니 힘들어도 작업이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존재의 집>(2022)을
만들게 되었다. 이렇게 보낸 시간이
형식의 변화로
이어졌다. 초기작은 클로즈업이나
시점 샷을
활용해 화자의
상태를 묘사하여
인물에게 몰입하기
좋은 구조였다. 당연히 신과 컷이
많았고 부담이
됐다. 최근에는 인물과
거리를 유지하는
원신 원테이크
방식을 취한다. 신과 컷을 간소화하니
아이디어가 생겼을
때 빠르게
작업에 반영할
수 있고, 작업의 부피 자체도
가벼워졌다. 이제는 다작을
위해 가벼운
작업과 까다로운
작업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서클>
- <서클>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주로 어디서 영감을
받는지도
궁금하다.
= 주로 지금
내가 질문하고
고민하는 것을
작업의 주제로
삼는다. 일단 이야기를
정하면 퍼즐
맞추듯 다른
과정들은 따라온다. <존재의 집>을 만들
때는 <상처받지 않는
영혼>이란 책을
읽으면서 말하고
싶었던 바를
명료하게 정리했다. <서클>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여겼던
작은 생각에서
출발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포함한
모두가 비슷한
선택을 하고, 그것이 패턴이 되어
딜레마 속에서
삶이 반복된다고
느꼈다. 만약 우리가
수많은 무의식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면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지
궁금했다.
-아직 국내에는 작품이
공개되지
않았다. 기대하는 관객들을 위해 <서클>을
짧게
요약한다면.
=<서클>은 저마다
자신만의 목적지를
가진 사람들이
무의식적인 관념에
갇혀버린다는 이야기다. 이 관념을 의심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지닌
폭은 점차
좁아지고 만다. 영화 속 작은
원처럼 의심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지기
전에, 자신을 얽매는
관념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으면
했다.
-<먼지아이> (2009) 등 초기작에서 중요하게
등장했던
소녀
혹은
아이가 <서클>에서도
결정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초기작과 <서클>에서 사용된
아이는 맥락이
다르다. 초기작에서 소녀는
내면의 아이다. 심리학에서 ‘내면아이’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처로 인한
자아가 있다는
뜻이다. 반면 <서클>의 아이는
내면의 아이와
무관하다. 아이들은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세계를
보지 않는다. 그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걸
향유한다. 따라서 자유롭게
관념을 만들고
지울 존재가
있다면 반드시
아이의 형상이어야
했다. 소녀는 그저
바닥에 나뭇가지가
보였고, 아무 생각없이
그림을 그리고
지웠을 뿐이다.

<서클>
-<연애놀이>, <존재의
집>, <파도> 그리고 <서클>까지 언제나 인물들이
퇴장한
텅
빈
화면으로
막을
내린다. 텅 빈 공간만큼
경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
보인다.
=나의 작업은
항상 고민에서
출발한다. 고민에 빠져
있을 때면
난 그
너머의 것을
보지 못한다. 그 때마다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항상
경계가 끝나거나
사라지는 것으로
엔딩을 맺으려
한다. 자신을 옥죄는
관념을 인지하는
순간 경계는
아무 의미
없어진다. <파도>(2023)에서 특히 이 맥락을
강조하고 싶었다. 파도는 등락이 있고
밀물과 썰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해변에서 사람들 역시
분주하게 한
행동을 반복한다. 하지만 결국 큰
파도가 몰려
온 뒤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고, 파도만 반복될
뿐이다.
-연필 드로잉 기법을
사용한다. 특유의 질감이 정유미
감독의
인장처럼
여겨진다. 디지털 시대에도 연필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연필은 안정감을
주는 재료다. 어릴 때부터 항상
쓰던 도구였고
가장 다루기
편하다. 사실 나는
미술 시간
때 배운
수채화가 싫었다. 한번 망치면 복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연필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어서 부담이
덜하다. 요즘 작가들과
달리 나는
여전히 종이로
캐릭터를 그리는
게 제일
빠르고 편하다. 원 소스를 연필로
그린 뒤에
태블릿으로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채색 기법을 도입할
필요도 못
느꼈다. 흑백 이미지만이
자아내는 미니멀하고
초현실적인 정서를
여전히 좋아한다. 채색까지 하게 되면
장수가 늘어나
작업 과정이
늘어나는 것도
싫다. (웃음)
- 그림책이나 그래픽 노블
작업도
왕성하게
하고
있다. 책과 애니메이션은 큰
차이가
있는데, 서로 다른 매체에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점이
있는가.
=어릴 때부터
그림책을 좋아했다. 대학 졸업 무렵, 에세이같은 작은 그림책을
만들었던 적이
있다. <먼지아이>를 만들면서
다시 그림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지아이>는 그림책
형태를 고려하고
만든 것이
아니었기에, 동작들을 담지
않으면 매력이
없어지는 이야기였다. 영화는 소리와 편집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묘사할
수 있지만, 그림책은 모든 것을
컷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그래픽
노블처럼 컷이
많은 매우
희한한 책을
만들게 됐다.

정유미 감독
-차기작이나 다른 계획이
있는가.
=<서클> 외에도 한
작품을 더
완성하고 영화제
출품을 앞두고
있다. 그 작품은
지금까지 했던
작업과 많이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
졸업하고 만든
일기 같은
에세이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번 작품은 채색
이미지로 구성
됐으며, 모션이 주가
되는 작품이다. 게다가 처음으로 내레이션도
시도했다. 지금까지는 소리를
최소화하는 연출만
했는데, 내레이션을 바탕으로
음악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감정적인
작업에 도전했다. 올해 꼭 공개할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정유미 감독의 작품 세계는 ( )다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다. 기존의 좁은 의식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작업한다.”
글 최현수 사진제공 정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