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영화인들과 만난 박찬욱×테드 서랜도스 대담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당시 워싱턴DC에서 성사된 만남에서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CEO)는 앞으로 4년간 K콘텐츠에 25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6월20일, 테드 서랜도스가 창작자들과 산업 전문가들이 건네는 구체적인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2016년 넷플릭스 최고 운영 책임자(COO)로 방한한 이후 7년 만이다. 6월21일 CGV용산아이파크몰 박찬욱관에서 ‘넷플릭스&박찬욱 with 미래의 영화인’ 대담을 가진 데 이어 6월22일 광화문에서 콘텐츠 제작자 및 VFX 파트너들과 만남을 가진 테드 서랜도스 공동 CEO는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크게 성공한 <오징어 게임>의 지표를 이기기는 쉽지 않겠지만 향후 잠재력을 생각하면 한국 콘텐츠는 이제 막 출발점을 보여준 것뿐”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제작될 5편의 작품 중 1편이 신예 작가 혹은 감독의 데뷔작이다. 앞으로도 미래의 작가, 감독의 산업적 육성에 기여하겠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제2의 박찬욱을 위해 필요한 것, 다양성
“<전,란>은 오랫동안 써온 각본으로 본격적으로 집필해서 완성한 것은 2019년이다. 규모감 있는 무협 액션 장르의 사극인데, 넷플릭스가 좋은 지원을 약속해줬고 간섭도 별로 없다. (웃음) 창조적인 결정에 있어 스튜디오의 문화와 정서가 어떠한가가 중요한 요소인데 <전,란>은 넷플릭스와 그런 면에서 협업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넷플릭스 영화 <전,란>의 작가이자 제작자인 박찬욱 감독이 넷플릭스와의 협업에 대해 밝힌 첫 소감이다. 테드 서랜도스 공동 CEO는 “한국 역사와 매우 밀접한 주제를 가진 <전,란>을 거장과 함께하게 되어 기쁘고 앞으로도 예산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창작자가 원하는 스토리를 최대한 실현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넷플릭스의 모델이고 이것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왔다”고 화답했다.
이동진 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대담은 미래의 영화인들과 한국영화의 가능성을 새롭게 전망한다는 주제를 갖고 객석에 젊은 영화학도들을 초대했다. 2017년 넷플릭스의 첫 영화였던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시작으로 글로벌 시장에 거대한 공을 쏘아올린 <오징어 게임>까지, K콘텐츠의 호황기를 바라보는 박찬욱 감독의 생각은 어떨까. 그는 “일제강점기와 전쟁, 독재정권, 빠른 산업화, 현재의 계급과 젠더 갈등까지 다사다난한 역사를 압축적으로 겪은 한국인들은 웬만한 자극에는 끄덕도 안 한다. 웬만한 것으로는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니 복합적인 감정을 큰 진폭으로 그리는 스타일이 자리 잡았고, 인류가 가진 보편적인 감정을 강하게 건드리는 한국 콘텐츠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어떤 영화는 차분하고 냉정할 수도 있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미덕으로 갖기도 할 텐데 지금은 다소 자극적인 면에 치중된 경향이 있다.” 테드 서랜도스는 국가 주도 산업으로서의 역동성을 높이 샀다. “도전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문화일수록 영화산업이 호황을 이룬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은 좋은 영화, 훌륭한 감독에 대한 국민적인 자긍심이 산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거대 공룡 OTT의 공동 최고경영자가 생각하는 훌륭한 이야기와 영화는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다. 테드 서랜도스는 “좋은 영화의 요건은 타인의 감정을 깊이 연결해주거나 현실 세계의 해방구를 마련해준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박찬욱 감독 역시 “영화는 개인이 경험하는 인생의 한정된 영역을 넓혀준다”면서 “넷플릭스 영화 중 <로마>를 가장 좋아한다. 1970년대 멕시코시티에 사는 가정부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영화는 나와는 다른 사람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해낸다. 이국적 풍광을 보여줄 수도, 전혀 모르던 직업 세계를 파고들 수도, 혹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관계를 지독하게 파고들어 인간 심리를 잘 묘사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빌려 이러한 작품을 만들어낼 감독 개인의 역량과 태도에 대해서도 넌지시 조언했다. “같은 작품을 두고 누군가는 내게 실험적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대중적이라고 한다. 나는 언제나 내가 제일 재밌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왔을 뿐이다. 다만 ‘관객이 공감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일은 놓치지 않는다. 정서경 작가든 가족이든 누구든 닥치는 대로 물어본다. 대화 과정에서 ‘안 통하는구나’ 깨닫는 순간엔 바꿔야만 한다.”
끝으로 테드 서랜도스는 코로나19 시대를 거쳐온 영화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그는 “다양한 기술의 발전은 스토리텔링 방식이 진화할 기회 또한 마련했다. 영화를 보는 방식이 다양해졌고 넷플릭스 역시 이를 더 좋은 경험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박찬욱 감독 역시 “영화의 미래는 ‘다양성의 증가’라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도, 보는 입장에서도 영화의 세계는 넓어지고 있다”면서 격변하는 영화의 시대를 마주하는 창작자들에게 격려를 보냈다.
넷플릭스와 시너지 내고 있는 한국 제작자들의 제언
임승용 용필름 대표(<로기완> <20세기 소녀> <콜>)
“어떤 이야기든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넷플릭스의 장점 아닌가. 기성의 감독들,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창작자들을 우선적으로 기용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신인들이 갖고 있는 혁신적인 이야기들을 더 눈여겨봐주길 바란다. 신인배우의 기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소녀>처럼 신인 노윤서 배우가 합류한 작품을 제작할 때 넷플릭스가 그 부분에 의구심을 보이지 않고 작품 자체만 놓고 픽업해준 경우가 좋은 예일 것 같다. 현재 생성되고 있는 모든 스토리가 첫 번째로 향하는 글로벌 1위의 회사인 만큼 초심을 잃지 말아달라.”
김지연 퍼스트맨스튜디오 대표(<오징어 게임> 시리즈)
“어제 테드를 잠깐 만났을 때 우스갯소리로 나눴던 이야기가 미국에서 택시를 타고 넷플릭스로 가자고 하면 택시 기사마저 스토리 피칭을 시작한다는 말이었다. 그런 농담이 나올 만큼 현재 전세계적으로 넷플릭스에 많은 작품들이 몰리는 게 사실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밸런스를 잘 맞췄으면 한다. 가령 모든 작품이 꼭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제작될 필요가 있을까. 해외로 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로컬에서 진정성 있게 시청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 더 다양하게 개발되어야 한다. 넷플릭스가 이런 부분까지 상당 부분 서포트해주길 기대할 수밖에 없는 시장 상황이기도 하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와 같은 한국 콘텐츠가 나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변승민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대표(<정이> <지옥> <발레리나> <D.P.> 시리즈)
“한국 콘텐츠는 현재 활황이면서 위기이기도 하다. 우선 개별 작품의 흥행에 따라 제작사, 창작자들이 지속적인 창작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수익 배분에 대한 룰이 더 다양하게 보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령 PPL의 경우, 한국 창작자들에겐 시청자들이 불편하게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이를 잘 소화할 수 있는 창의성을 발휘할 역량이 있다. 제작자로서는 OTT 관람 방식에 따라 시청자들의 주의를 붙잡고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무래도 좀더 자극적인 부분을 고민하게 되는데, 이제는 다른 리듬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갈증도 느낀다. 한국의 <로마>나 <파워 오브 도그>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 플랫폼이 지속되고 꾸준히 재미와 감동을 주려면 다양성이 공존해야 한다. 클래식한 문법을 선보이는 작품들에도 기회가 늘어야 한다. 또 <D.P.> 시즌1과 <지옥>을 통해 인상적으로 경험한 것 중 하나가 넷플릭스 마케팅의 획기적인 기획력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제작 면에서 물량공세가 시작되면 작품당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자원들의 한계도 뚜렷해지지 않을까. 열심히 제작된 작품 한편 한편이 정확하게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마케팅 영역에서의 넷플릭스의 장점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길 바란다.”
김수아 시작컴퍼니 대표(<솔로지옥> 시리즈)
“일단 예능 물량 자체가 시리즈에 비해 적다. 물량이 많아야 좋은 작품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 단순한 사실이다. 그러면 넷플릭스를 대표할 수 있는 IP들이 한국 제작자에게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 단위로 작업하는 것이 익숙하다 보니 예능은 제작 사이클이 빠르다. 한국 넷플릭스에서도 이것을 알고 예능 콘텐츠의 사이클을 유연하게 가져가려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 부분에서 더 적극적인 시너지가 생성되길 바라며, 아무래도 리얼리티 쇼는 현지화가 중요하므로 더빙과 자막 작업도 완성도 있는 작업이 계속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IP 독점이 아닌 지속 가능한 상생으로
- 글로벌 시장에서 할리우드에 대적하는 한국 콘텐츠만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테드 서랜도스 한국의 패션, 음악, 음식 등 전통적이고 개성 있는 요소들이 스토리텔링과 조화를 이루고 시너지 효과를 낸다. 정해진 공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도 장점이다. 상업적으로 훌륭할 뿐 아니라 예술성이 뛰어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고현주 한국 로맨스 콘텐츠 조회수의 약 90%가 해외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한국 시청자들에겐 비교적 익숙한 장르일 수 있지만 해외 시청자들은 한국형 로맨스가 섬세하고 미묘하게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신선하게 느끼고 이에 반응하고 있다.
- 브라질 투둠 행사에서도 한국 콘텐츠에 대한 뜨거운 반응이 감지됐는데, 현재 넷플릭스 K콘텐츠 강화를 위한 현지화 전략이 있다면 무엇인가.
강동한 이번 브라질 투둠에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보면서 글로벌 마케팅에 예산을 더 투입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브라질, 멕시코쪽에서도 한국 콘텐츠에 대한 팬덤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기회가 많은 시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테드 서랜도스 박찬욱 감독이 프로듀싱하는 <전,란>과 같이 한국의 역사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전세계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케이스가 늘어나길 바란다.
- 향후 4년간 25억달러의 대규모 투자가 어떤 분야에서 주로 집행될까. 성공에 따라 창작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주어질까. 영화나 다큐멘터리처럼 더 다양한 포맷에 집중한다는 뜻인지, 업계와의 상생 방안이 있는지 궁금하다.
강동한 제작비 안에는 창작자에 대한 보상도 있고, 배우들의 개런티도 있다. 앞으로 제작을 충분히 지원한다는 계획 안에는 창작 생태계에 대한 다양한 투자가 포함돼 있다. 또 한국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기존에는 시리즈 중심으로 투자했다면 이제는 다양한 분야에 투자할 수 있게 보다 큰 계획을 길게 실행하도록 준비 중이다.
이성규 N 프로덕션 스토리 워크숍의 사례를 언급하고 싶다. 현재까지 넷플릭스가 진행한 워크숍 중 가장 큰 행사였고, 3일 동안 600여명 넘는 제작자, 창작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노하우를 공유했다. 이런 기회도 점차적으로 늘려갈 수 있을 것이다.
- 넷플릭스가 OTT 시장을 장악하면서 한국의 주요 IP를 독점한다는 우려가 있다. 어떤 행보를 보여줄 것인가.
테드 서랜도스 경쟁이 과도한 시장에서 창작자들이 충분한 보상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함께 노력할 것이다. IP가 활용됨에 따라 지속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가겠다.
- 가족 외 공유 계정에 추가 요금을 매기는 정책을 마련해 캐나다, 뉴질랜드,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시범 시행했고, 지난 5월에는 미국에도 적용된 상황이다. 계정 공유 단속에 대한 앞으로의 입장은 어떤가. 한국엔 언제 도입되나.
테드 서랜도스 새로운 계정 공유 방식은 앞으로 전세계에 동일하게 적용하고 확장해나갈 예정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늘 특별히 더 안내할 사항은 없고, 지켜봐 달라.
- 글로벌 콘텐츠사업자(CP)와 인터넷서비스공급자(ISP)인 국내 통신사들간 망 사용료 이슈에 대한 입장은.
테드 서랜도스 최대한 협업할 것이다. 우리는 현재 10억달러를 오픈 커넥트 시스템에 투자해 비트 전달이 용이하도록 돕고, 전세계 6천개 이상 지점의 다양한 국가에서 인터넷이 빨라질 수 있게 했다. 앞으로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계속 투자할 예정이다.
강동한VP, 테드 서랜도스 CEO, 이성규 시니어 디렉터, 고현주 PR 총괄 디렉터(왼쪽부터).
강동한 VP, 테드 서랜도스 CEO, 임승용 용필름 대표, 김지연 퍼스트맨 스튜디오 대표, 변승민 클라이맥스스튜디오 대표, 김수아 시작컴퍼니 대표(왼쪽부터).
테드 서랜도스 CEO(왼쪽), 박찬욱(오른쪽).
김소미·편집 조현나·디자인 김차인애·사진제공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