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다'는 낙관론 이면에서, 할리우드는 전문가를 위한 'AI 미들웨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CES 2026 디지털 할리우드 리더십 키노트 패널. 좌측부터 레슬리 섀넌, 엘라브 호르위츠, 한나 엘사크르, 크리스티나 셰퍼드, 사미라 박티아르. <출처 R. Salkowitz / Digital Hollywood CES>
CES 2026에서 AI 열기는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그러나 라스베이거스 디지털 할리우드 세션에 모인 엔터테인먼트 업계 관계자들의 관심사는 AI의 '가능성'이 아니었다. 25개 이상의 패널이 편성된 이번 행사에서 스튜디오 진영과 디지털 크리에이터 영역 모두 하나의 질문에 집중했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가'였다.
할리우드에서 AI는 민감한 주제다. 2023년 작가·배우 파업의 핵심 쟁점이었고, 지난가을 최초의 'AI 배우' 틸리 노우드(Tilly Norwood)가 등장했을 때는 업계 전반이 거세게 반발했다. 저작권 침해와 창작자 보호 문제는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이번 CES에서 다수의 연사는 AI가 창작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량을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 낙관적 입장을 보였다.
'민주화' 담론: 스토리텔링 문턱을 낮추다
AI 옹호론자들은 창작의 민주화를 강조했다. Leonardo.ai의 드웨인 코(Dwayne Koh) 크리에이티브 총괄은 "AI 덕분에 누구나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게 됐다"며 "이전에는 기회조차 없던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Adobe의 한나 엘사크르(Hannah Elsakr) 생성형 AI 신사업 부문 부사장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는 AI를 "창작 도구 상자에 추가된 또 하나의 도구"로 규정하면서, 높은 수준의 창작물은 여전히 감독과 아티스트, 배우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1990년대 포토샵이 출시됐을 때도 "크래프트를 파괴한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결국 창작자의 도구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미들웨어' 요구: 90%와 10%의 간극
그러나 낙관론 이면에는 냉정한 현실 인식도 존재했다. AI 영상 제작 패널에서 Secret Level의 제이슨 자다(Jason Zada)는 AI 도구의 진화 속도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결정적 한계를 지적했다.
"90%까지 도달하기는 그 어느 때보다 쉬워졌다. 그런 결과물을 볼 때마다 왜 나머지 10%를 채워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든다." — 제이슨 자다, Secret Level
자다의 지적은 명확하다. 범용 AI 도구로 일정 수준까지는 쉽게 도달할 수 있지만, 'AI 슬롭(AI slop)'과 걸작을 가르는 것은 마지막 10%라는 것이다. 그는 "AI가 할리우드 장편 영화 제작에 실질적으로 쓰이려면 미들웨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반 사용자용 프롬프트 기반 도구와 전문 제작 파이프라인용 시스템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기술-창작자 협업과 윤리 논쟁
전문가용 AI 도구의 품질을 높이려면 기술 개발자와 창작자 간 협업이 필수적이다. Luma AI 드림 랩 LA의 베레나 품(Verena Puhm)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게 뭘 잘못하고 있는지 매일 이야기한다"며 "그들은 그 피드백을 환영한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WPP의 엘라브 호르위츠(Elav Horwitz) 최고혁신책임자는 "테이스트를 훼손하지 않는 AI"를 강조하며 고급 브랜드를 위한 세련된 AI 영상 캠페인 사례를 선보였다. 전문가의 안목이 AI 결과물의 품질을 결정짓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AI 윤리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배우이자 감독인 조셉 고든-레빗(Joseph Gordon-Levitt)은 최근 'Creators Coalition on AI'를 설립하고 AI 기업들의 학습 데이터 활용 관행을 정면 비판했다. 그는 AI 모델들이 창작자의 동의나 보상 없이 영화, 책 등을 학습에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 수동적 절도를 용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현재 AI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스릴러를 직접 각본·감독 중인 그는 기술 자체에는 낙관적이지만, "일부 대형 AI 기업의 비즈니스 인센티브가 우리를 어두운 길로 이끌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사점: '10%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
이번 CES 디지털 할리우드 세션은 할리우드 AI 담론의 분기점을 보여줬다. '창작의 민주화'라는 거대한 서사 아래, 산업 현장에서는 범용 도구와 전문가용 미들웨어라는 두 갈래 길이 선명해지고 있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창작계의 반발은 포토샵 시대에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와 다른 점이 있다. AI는 단순한 보조 도구가 아니라 창작 행위 자체에 개입할 수 있다.
제이슨 자다가 제시한 "AI 슬롭을 넘어 시민 케인으로"라는 비전이 실현되려면, 기술 발전만큼이나 창작자의 테이스트와 크래프트가 시스템에 반영돼야 한다. AI 시대에도 '10%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한국 영화 산업에도 시사점이 있다. 글로벌 수준의 VFX 역량을 갖춘 한국은 AI 도구의 단순 수용자가 아니라, 전문 제작 파이프라인에 최적화된 미들웨어 개발의 주체로 나설 수 있다. 민주화된 AI 도구가 넘쳐나는 시대, 차별화의 열쇠는 그 도구를 다루는 전문성과 안목에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Forbes, "CES 2026 Digital Hollywood: Is AI Ready For Its Close-Up?" (2026.01.06)
AP News, "Entertainment leaders amp up discussions about AI, creators and innovative tech at CES 2026" (2026.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