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가 국경을 넘는 방식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필요한
것은 시나리오와 자본만이 아니다. 〈사이공 오빠(Saigon
Oppa)〉는 중국에서 시작해 태국을 거쳐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10년 넘게 국경과 정세를
넘나들며 판을 새로 짜기를 반복한 프로젝트다. 서울 로케이션이
80~90%를 차지하는 이 한국·베트남·말레이시아 3개국 합작 프로젝트의 이면에는, 2000년부터 같은 자리에서 아시아와 손잡아온 필름라인의 25년이
있다. K-팝에 빠진 아내를 찾아 서울로 온 두 베트남 남편의 좌충우돌을 그리는 이 작품의 진짜 비하인드를 듣기 위해 촬영을 앞둔 필름라인 사무실에서 그 이야기를 찾았다.

〈사이공 오빠〉 티저 이미지. “From
Saigon’s streets to
Korea’s beats, one
unforgettable journey.” (제작사 제공)
아시아와 함께한 25년
- 필름라인이 동남아시아와 오래 협업해온 것으로 안다. 어떻게 시작됐나.
2000년부터 이 사무실에서 25년째다. 초창기에는 일본 영화 및 방송프로그램의 한국 촬영 프로덕션 서비스를 하면서 시작했다. 당시 일본 경제가 버블 시기라 작품이 많이 들어왔는데, 2010년경부터
일본 영화·미디어 산업이 하락세로 접어들면서
해외 촬영 프로젝트들이 줄었다. 그때 동남아시아로 포커스를 돌렸다. 마침
한국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을 기획한 말레이시아 영화와 태국 영화가 있었고, 우리가 말레이시아 영화의
프로덕션 서비스를 맡았다.
서울과 남이섬을 배경으로 90% 한국 로케이션으로 찍은 그 말레이시아 영화 <아쿠아다
카우아다(Aku Ada Kau Ada)>(2011)가 현지에서 로컬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그때 인연을 맺은 라힐라 알리 감독과는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져서, 작년 2025년 겨울에 말레이시아 영화 <티켓 세할라(Tiket Sehala)>(2026)를 안동에서
촬영했다. 다시 거슬러 가서, 그 다음 해에 한국 로케이션으로
온 필리핀 영화 〈키미도라〉시리즈 2, <키미도라와 키예메사원(Kimmy Dora and The Temple of Kiyeme)>(2012)은 조이스 베르날 감독의 작품이었는데, 필리핀에서 최초로 관객 백만 명을 돌파했다. 그 뒤로 이 영화의
제작사 스프링필름스와 <선샤인 패밀리(Sunshine
Family)>(2020)를 공동제작해서 성과를 거두었다. 필리핀 프로덕션들과도 지금까지
좋은 프로젝트들로 이어지고 있다.
- 해외 프로덕션들과 관계가 오래 유지된 비결이 있나.
우리는 작은 독립 프로덕션이다. 초창기 일본 방송국 및 제작사들과 일할 때부터 투명하고 완성도 있게 일해온 것을 인정받았고, 신뢰를 차곡차곡 쌓아왔다. 거기에 동남아시아에 한류 붐이 겹쳤다. K-웨이브로 한국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고 좋은 한국 콘텐츠가 쏟아지면서, 한국과
협업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 흐름을 고맙게 잘 탄 셈이다. 한국 영화만 제작했다면 이 사무실을 20년 넘게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고맙게도 국내외 좋은 파트너들이 있었고, 그들과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서로의 믿음을 바탕으로 일을 하고자 했다.
“제작비가 한국보다 작을 뿐, 영화에 대한 열정이나 프로세스는 똑같다. 오히려 우리가 거꾸로 배우는 것도 많다.”
문화 차이에서 오는 고충도 있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덜하다 보니, 현장의 여유는 좋지만
제작비 정산 면에서는 간혹 애를 먹는 경우도 있어 시작 전 계약에 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동남아시아
스태프들과 일하면 촬영 현장 분위기가 참 좋다. 한국이나 일본의 현장은 드라이한 편인데, 그들은 여유와 너그러움이 있다. 촬영을 끝내고 헤어질 땐 다들 울
정도로 정이 든다. 함께 웃으며 즐겁게 일하는 그들의 순수함은 배울 점이다.
- 〈사이공
오빠〉는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기사에는 〈육사오〉 이후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 훨씬 오래됐다. 처음엔 김태식 감독의 한일한작 영화〈도쿄택시〉(2010) 개봉 이후, 한류에 빠진 일본 아줌마가 한국에 온다는 소박한 이야기로 일본과 공동제작하려던 기획이었다. 그러다 김 감독이 오사카 아시안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갔다가 만난 말레이시아 제작사 대표 프래드청이 “중국 버전으로 사이즈를 키우자”고 제안했다. 대만금마장영화제 FPP(Film Project Promotion)로 선정돼 참가했고, 중국의
메이저 제작사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 손의 작은 프로젝트가 백억원대의 큰 규모 프로젝트가 됐다.
2014~15년에 중국을 몇 번씩 오가며 진행했다. 그때
시나리오를 박규태 감독이 썼다. 그런데 사드가 발발했고 정치적 이슈로 프로젝트가 홀딩됐다. 말레이시아 제작사 대표와 계속 기회를 보고 있었고, 태국 버전을
거쳐, 마침내 한국-베트남-말레이시아
공동제작 프로젝트로 이르렀다.
- 그 시점에 〈육사오〉가 베트남에서 흥행한 것이 결정적이었겠다.
운이 좋았다. 마침 박규태 감독의 〈육사오〉가 2022년 베트남에서 개봉한 역대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그때, 김태식 대표가 박 감독에게 연출을 제안했고 이에 동남아시아 시장을 바라본 박 감독도 해보고 싶다며 프로젝트가
성사됐다. 시나리오를 베트남 버전으로 새로 썼다. 〈육사오〉
팀이 베트남에 프로모션을 갈 때 함께 가서 베트남·말레이시아 파트너들과 처음 다
같이 만났다. 그게 2022~23년의 일이다. 이듬해 2024년 호치민국제영화제 프로젝트 마켓 선정작이 됐고, 지난해 공동제작 협약으로 이어졌다.

영화제 무대에 오른 〈사이공
오빠〉. “BHD
30주년
무비 라인업 2026”의 하나로 소개되며 3사 공동제작 프로젝트로 관객과 만났다. 김태식 대표(왼쪽)가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중앙에 박규태 감독 . (제작사 제공)
- 지난해 정부 간 포럼에서 공식 발표된 것이 그 결과인가.
그렇다. 지난해 2025년 베트남
총서기장 방한 때 문화사절로 베트남 응우옌 반 훙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내한했고, 한국의 최휘영 문화제육관광부
장관과 함께한 자리에서 베트남 공동제작사 BHD가 영화계 대표로 나와 공동제작 런칭 발표를 했다. BHD는, 1996년에 설립된 영화 및 방송 콘텐츠 투자배급제작사로
베트남 로컬 상위 2위 극장체인을 소유하고 있다. 베트남
내 한국 드라마시리즈 및 전세계의 고품질 음악, 영화 채널을 베트남에 소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다양한 글로벌 콘텐츠사와 협력하여 베트남 콘텐츠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2025년 8월 1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한·베트남 문화산업 발전 협력 포럼’에서 열린 〈사이공 오빠〉 공동제작 협약식. 양국 정부 관계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3사 대표가 양해각서(MOU)를 들어 보이고
있다. (제작사 제공)
세 나라, 세 개의 역할
- BHD와는 어떻게 연결됐나. 한국-베트남 정부 포럼이 계기였나.
아니다. BHD와 연결해준 것은 말레이시아 웹TV아시아 대표 프레드청이다. 그 뒤
BHD 대표로부터 한-베 정부 포럼에 관해 연락이 왔다.
- 그렇다면 말레이시아 측, 웹TV아시아의 역할은 무엇인가.
웹TV아시아는, 말레이시아 본사를 비롯하여 아시아 8개국 –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대만, 홍콩 – 에 지사를 두고 있는 글로벌 콘텐츠 그룹으로, 영화 및 웹콘텐츠를 제작 배급하며
아시아 탑 인플루언서들의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웹TV아시아는 투자와 음악 파트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주인공은 모두 베트남 배우다. K-팝에 열광하는 팬들이 한국에
와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 제작과 배급의 역할 분담은.
투자는 세 회사가 함께 하고, 제작은 로케이션의 80~90%가 한국으로 우리 한국제작사가 담당한다. 베트남 촬영 분량은 주인공 가족의 집과 직장, 외부 로케이션 정도로
일주일 남짓이다. 베트남 로케이션 촬영과 함께, 베트남 시장을
주요 타깃으로 하는 배급도 BHD에서 잘 맡아 진행할 것이라고 믿는다.
국제공동제작이라는 수익 구조
- 해외 공동제작이 실제로 수익이 되나.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공동제작의
경우, 전체 예산은 적지만 현지 톱배우를 기용할 수 있고, 그렇게
제작 후, 행운이 따르면 성수기 시즌에 개봉한다. 한국 독립영화를
제작해 국내 시장에만 개봉하는 것에 비해, 다른 나라와 공동제작해서 해외로 나갈 때 수익이 생기는 구조를
몇 차례 경험했다. 국내 독립영화의 글로벌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사이공
오빠〉도 시즌을 노리나.
베트남에서 가장 좋은 개봉 시기는
우리와 같은 구정 연휴다. 원래 그 시즌에 맞춰 일정을 계획했는데, 진행
과정에서 문제가 있어 촬영을 올해 11월-12월로 다시 정했다. 베트남은 OTT 이용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고 극장에 가는 오락
문화가 살아 있어서, 잘 만들어서 성수기 시즌에 개봉하면 좋은 흥행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 국제 프로젝트라 계약 구조가 복잡했을 것 같다.
처음엔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측에서
투자를 다 맡겠다며 한국에 룸을 주지 않았다. 한국 필름라인은 감독과 한국 아이돌 배우 세팅, 한국 로케이션 제작을 담당하는 틀이었다. 그런데 굴곡이 있었고, 판을 다시 구성했다. 한국이 절반,
나머지 절반을 베트남과 말레이시아가 50 대 50으로
펀딩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고맙게도 그 타이밍에 영진위 국제공동제작 지원사업 선정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이
키를 쥘 수 있는 구조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배우 캐스팅 및 투자 구조에
변수가 생기면서 한 번의 풍파를 넘었다. 다시 세팅하면서 한국이 절반을 펀딩하는 구조로 갈 때, 고맙게도 영화진흥위원회 국제공동제작 지원사업 발표가 났고 우리 영화가 선정됐다.
현지화 리스크와 시장의 현실
- 베트남은 검열이 있는 것으로 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영화
검열이 비교적 엄격한 국가에 속한다. 정치, 역사 관련 이슈에
민감하고 국가 이미지를 훼손하는데 대해 엄격한 면이 있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문화로 종교적
검열이 세다. 키스 장면도 불가한 경우가 있었다. 2023년에
제작한 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공동제작 영화 <룩앳미 키스미 터치미>(2023)의 경우, 말레이시아 개봉 시 심의에서 키스 씬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고 등급에 영향을 받았다. 필리핀은 미국 영향을 많이 받아 텐션이 다르고 심의 등급도 미국과 유사하다.
- 한국 개봉 계획은.
철저히 베트남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작품이나,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도 개봉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동남아시아 영화를 개봉해 수익이 난 예를 찾기가 어렵다. 와이드 릴리즈는 드물고 영화제나 기획전
정도다. 현재, 배급사와 한국 개봉을 함께 논의 중이다. 박규태 감독이 코미디에 일가견이 있고 전작의 흥행 성적이 있으니, 한국
관객들에게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길 기대한다.
사람과 신뢰, 그리고 문화의 위상
- 해외 공동제작에서 현지 네트워크가 특히 중요해 보인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믿음과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초창기에 함께한 회사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스태프들도 그렇게 이어진다. 공동제작은
서로 지킬 것을 지켜가는 것이 핵심이다.
- 동남아시아 시장을 대하는 한국 배우들의 인식도 달라졌나.
예전의 동남아시아 영화 및 드라마의
한국 촬영 프로젝트는, 그 나라의 톱스타가 오고 한국 배우 캐스팅은 엑스트라나 조연 정도였다. 요즘은 한국 콘텐츠가 워낙 해외로 많이 뻗어 나가서, 드라마에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친 배우를 캐스팅해달라는 요청이 많다. 출연료의 갭이 있어서 한국 배우들의 캐스팅이 쉽진 않지만, 동남아시아 시장을 대하는 한국 배우들의 인식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
“이 이미지와 인식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주저앉는
건 한순간이다.
고마운 파트너들이라는
걸 깊이 새기고 겸손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동남아시아 분들을 차별하는 면이 있었는데, 점차 개선되고 있는 느낌이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재한 이주민은 가족 구성원 추산 약 250만명이다. 국제공동제작을 통해 영화를 함께 만들고 다양성을 보여주면서, 한국 사회가 다양한 문화를 함께 수용하는 사회가 되는 데 우리가 역할을 하고 싶다. 문화 저변의 확대는 돈만으로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위상이
높아지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정부 간 문화
협력을 배경으로 한 프로젝트라는 점은 부담이 되지 않나.
정부가 문화사업에 관심을 가져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잘 만들어야 그것도 빛이 날 거라고 생각한다. 마침 베트남과 한국 정부가 교류할 때 매칭이 됐고, 여러 분이 관심을
가져주시니 책임감도 크다.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